본문으로 바로가기

[책]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5

category 리뷰/책 2023. 8. 28. 13:44
이야기 중국사 5권은 남송, 금, 원, 명이 건국된 이후 시기까지를 다룬다. 정강의 변 이후 금군이 개봉을 점령하여 북송 정권이 멸망하고 떠밀리듯 내려가 남송을 세운 강왕 조구는 고종으로 즉위한다. 금나라는 장방창을 초 황제로 삼아 금릉에 정권을 세웠지만 회하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멈추었다. 이는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여진족의 비율이 지나치게 적어져 본인들에게도 불리했기 때문이다. 금나라는 희종 시대에 약 100만명 정도 되는 규모의 여진족 중원 이주를 감행했다. 그러나 이동 후 그들은 여진족 본연의 수렵, 사금 채취 생활이 아닌 익숙하지 않은 농경 생활을 해야 했으니 한족에 비해 소출이 잘 나오지 않았고 심지어 한족에게 땅을 뺏기는 일도 벌어진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여진인들이 한의 문화에 동화되었다는 사실인 것 같다. 거란인은 한 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들 본연의 문화는 살아 있었다. 그런 반면 여진인은 이주 후 상당 부분이 한 문화에 동화되어 중원 국가화되었다.
 
문화에 면역성이 없는 여진족은 곧바로 한문화의 화려함에 눈이 멀어 민족 고유의 야성적인 활력을 잃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것보다 오히려 이쪽이 더 큰 문제였다. 여진족의 한족화(漢族化)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요나라의 경우는 ‘한(漢)의 분위기가 연운 16주로 한정되어 있었다. 국가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이원제(二元制, 二院制) 정치로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북을 취하고, 나아가 하남으로 진출한 금나라는 ‘한‘의 것이 주류였다. 이원제의 정체(政體)를 폐지한 것은 그것으로는 이제 해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금나라는 요나라와 달리 한적(漢的)인 중원 국가로 변질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중원으로 진출할 것을 결정했을 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금나라 황제는 여진족의 수장이라는 성격보다 한적 중원 국가의 천자라는 성격을 강화하지 않을수 없었다. - P76~77
 
금나라 땅은 쌀이 거의 생산되지 않았고 쌀을 남송에서 받아야 하는 처지인 상황에 이주한 여진인들이 한화하면서 쌀 수요가 늘었다. 해릉왕은 이에 남정을 단행했으나 거란이 반란을 일으키고 전쟁을 위한 징병 등 증세로 백성들은 피폐해졌다. 이에 세종은 해릉왕이 남쪽으로 내려간 사이에 백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한다. 세종은 금나라의 '요순'으로 평가되는 인물이었다. 해릉왕은 항주까지 진격했으나 남송군에게 밀려 숨고르기를 했다. 그는 3일 이내 도강하지 않으면 장군들을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다가 장수들에게 시해당하고 만다. 해릉왕이 시해되자 금군은 철수했고 남송군에게 화의를 신청했다.
남송은 금나라가 영유하고 있는 북쪽 땅을 회복하지 않으면 중화제국의 영예를 되찾을 수 없었다. 금나라는 남송이 지키는 회남 이남 땅을 빼앗지 못하면, 경제적으로 균형이 잡히지 않은 결함 국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두 나라 모두 북벌과 남벌이 국가의 기본방침이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그것을 이룰 힘이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다시 강화를 맺었다. 국경선은 이전 소흥(금나라 황통) 화약과 똑같았다. 다만 해릉왕의 폭주와 거란족의 대반란 등으로 금 쪽이 조금 불리했다. 따라서 효종 건도(乾道) 원년(1165, 금나라 세종 대정 5년)에 맺은 새로운 화약은 남송에게 조금유리해졌다. 소흥 화약의 세공은 은 25만냥, 비단 25만필이었으나, 건도 화약은각각 20만 냥, 20만 필로 줄었다. 더구나 이를 ‘세공‘이라 하지 않고 ‘세폐(幣)‘라고 불렀다. 소흥 화약에서는 두 나라의 관계가 남송이 금나라에 신종(臣從)하는것이었다. 건도 화약은 이를 ‘숙질(叔)‘ 관계로 고쳤다. 옛 화약에서 군신이었던 것이, 새 화약에서 숙부와 조카 관계로 개선된 것이다. ‘공(貢)‘을 ‘폐(幣)‘로 한 것은 속국의 진공이 아니라는 의미다. - P101
 
남송 제일의 시인은 육유다. 그는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애국 시인인 굴원과 같은 위치를 점했던 인물이었을 것 같다. 그는 북송 휘종 때 태어나 정강의 변을 겪었을 때 가족과 함께 피난을 떠났다. 아버지인 육재가 주전파였던 만큼 그도 북송은 멸망했지만 송의 국토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믿으며 성장했다. 하필 진사 시험에서 진회의 손자와 붙는 바람에 낙제했는데 이 때문에 주전파에 더 천착했는지도 모르겠다. 육유는 평생 1만 수의 시를 썼을 만큼 다작을 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시를 썼는데 마지막 작품은 <아들에게>라는 제목의 시였다.
꿈에서도 잃어 버린 땅의 회복을 잊지 않은 육유는 애국시인으로서도 칭송받는다. 중국이 외국에게 영토를 빼앗겼을 때, 사람들은 육유의 시를 애송했다. 송나라 시 중에서도 육유의 시는 특이하다. 송시의 특징은 그 냉정함에 있다. 조용히 응시하는 시 정신에 뒷받침된 탓이다. 그런데 육유의 시는 결코 냉정하지 않다. 후세의 역사가가 ‘남송의 최전성기‘라고 평가한 시대도 육유는 그것을 절반은 침몰한 시대로 받아들였다. - P116~117
죽으면 만사가 헛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으나,
다만 구주가 하나 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게 슬프구나.
황제의 군대가 북녘땅 중원을 평정하는 날,
집안 제사를 잊지 말고 내게 알려다오
 
칭기즈 칸의 팽창은 금나라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로 일어났다. 대책을 강구하려고 해도 사태는 시시각각 변했다. 어쩌나, 어쩌나 하는 동안에 이미 대책을 강구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금나라는 여러 유목 부족에게 경계의 눈길을 보냈으나, 칭기즈 칸 같은 전쟁의 천재가 출현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천재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금나라의 정책이 잘못 되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않다. 오는 강가에서 쿠릴타이를 연 뒤, 칭기즈칸은 전체 몽골 민족의 조직을 개조했다. 목가적인 동족 공동체였던 것을 철저하게 군사적 집단으로 다시 편재한 것이다. 10호, 100호, 1천 호, 1만 호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행정단위이면서 동시에 전투단위도 되었다. 여진족의 맹안이나 모극과 비슷하다. 몽골족은 자주 이동하기 때문에 이 조직은 특히 효과적으로 기능했을 터이다. 십호장(戶長), 백호장, 천호장, 만호장이 각각 임명되었다. 만호장에는 칭기즈 칸이 신임하는 보르추, 무카리, 나야아가 임명되었다. - P137~138
칭기즈칸은 금나라를 치기 전에 금을 섬기는 서하를 먼저 공격함으로써 금에 경고장을 보냈다. 서하는 금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금나라는 움직이지 않았고 서하는 남송에 손을 뻗는다. 칭기즈칸은 친정하여 금군과 싸우다 부상을 입어서 후퇴해야 했지만 이 무렵 금나라 내부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육유가 85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원호문은 19세 정도의 나이였다. 육유는 북방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사망했으나 그가 주로 활동하던 시기는 건도화약으로 금과 남송 간의 관계가 평화로웠다. 하지만 원호문은 칭기즈칸이 금을 침공하던 무렵 22살이었고, 금이 몽골에 멸망했을 때 45세의 나이였다. 그가 68세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는 전쟁으로 나라는 피폐했고 끝내 금나라가 원에 멸망할 때까지 충성을 버리지 않았다. 난세가 시인을 만든 셈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그의 시 중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신조협려에 등장한 '정이란 무엇이길래'이다. 제목을 봐도 느껴지지만 기러기 한 쌍을 보고 지은 시인데 정이란 쉽게 끊을 수 없는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세상 사람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생과 사를 같이하게 한단 말인가.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저 새야.
지친 날개 위로
추위와 더위를 몇 번이나 겪었느냐?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고통 속에
헤매는 어리석은 여인이 있었네.
임이여 대답해주소서,
아득한 만리 구름이 겹치고
온 산에 저녁 눈 내릴 때
외로운 그림자 누굴 찾아 날아갈꼬. - < 안구사雁丘詞 >
 
원호문은 120년을 이어온 금조에서 감히 비교할 자가 없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같은 시대의 남송을 포함해서 12세기와 13세기 중국 최고의시인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일 것이다. 태평성대였어도 그는 뛰어난 시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중국문학사에서 이렇게까지 위대한 존재로 만든 것은 역시 몽골의 침공이라는 난세를 시로 읊었기 때문이다. 주제가 너무 엄청나면 시문이 받아들이기어렵다. 하지만 원호문의 시문은 처참한 시대의 모습을 훌륭하게 담아내고 있다. 청나라의 조익이 원호문을 노래한 시 가운데 ‘국가의 불행은 시인의 행복‘이라는 구절이 있다. 조심하지 않은 표현 같지만, 이 구절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힘이 있다. - P149
몽골의 공격으로 마침내 개봉의 성문이 열렸다. 금나라 주요 관료들은 포로가 되었는데 원호문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요성이라는 곳에 유폐되었다. 유폐된 곳에서 < 계사 5월 3일 북으로 건너가다 >라는 제목으로 그는 시를 지었다.
길가에 쓰러져 엎어진 포로가 즐비하고,
지나가는 전차는 물이 흘러가는 듯하다.
여인은 곡하며 회골의 말을 뒤따르고,
뉘를 위해 걸음마다 뒤돌아보는가.
 
1234년 몽골과 남송 연합군의 공격에 금나라는 마침내 멸망했다. 몽골 제국은 유목민족계 정권이어서 막내 아들이 상속하는 관습을 따랐다. 단 영지상속과 몽골의 국주 계승은 별개의 문제였다. 칭기즈 칸 제국의 약점은 쿠릴타이의 구성과 기능이 명확하지 않아 후계자 선출에 불안 요소가 많다는 점이다. 이 정권은 세계 제국이 된 뒤에도 여전히 부족공동체 분위기에 머물러 있었다. 오는 강 유역에서 유목하던 시기에는 그것이 소박하고 평화롭게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국과 이슬람, 유럽의 문명지역까지 뻗어나간 나라가 된 이상, 이제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 - P189 칭기즈칸 사후 대쿠릴타이에서 카간으로 추대된 것은 셋째 아들 우구데이였으나 상속법에 따르면 톨루이가 계승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행히 톨루이는 우구데이의 즉위를 인정하여 제국의 분열을 막을 수 있었다. 우구데이는 태종으로 즉위한 기간 동안 금나라를 토멸하고 카라코룸에 궁전을 지었다. 그는 후계자로 손자인 시라문과 톨루이의 장남 뭉케를 지목했으나 대쿠릴타이에서 황후인 투르게네가 그의 유지를 어기고 장남인 구육을 즉위시켰다. 구육은 정종으로 즉위했지만 주치 집안의 가장인 바투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두 세력 간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으나 정종의 급작스런 사망(3년 만에)으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바투는 쿠릴타이를 열어 톨루이 집안의 뭉케를 칸으로 추대했다. 헌종 뭉케는 남송 토벌군을 일으킨 1259년 사망했는데 계승을 둘러싸고 또 툴루이 집안의 네 아들 간에 내분이 일어난다. 잘 알고 있듯 최종 승자는 쿠빌라이다. 이 때 고려의 원종이 적지 않은 힘을 실어주었다는 것은 우리도 잘 아는 사실이다.
 
몽골은 남송과 함께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 하남 땅을 남송에게 반환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 남송에는 주전론이 힘을 얻으면서 군대를 출병시켰다. 몽골군은 송군의 출병 소식을 듣고 남하했다. 남송군이 출병하지 않았다면 몽골군은 남하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 후 수년에 걸쳐 남송과 몽골의 싸움이 계속되면서 백성들의 고통은 날로 가중되었다. 이미 원(元)이라 칭한 몽골이 남송을 공격하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양양(襄陽)이었다. 남송이 양양을 확보하고 있는 한, 원은 ‘함부로 군대를 진격시킬 수 없었다. 뭉케의 명령으로 쿠빌라이가 남하했을 때도 양양을 공략하지 않고 악주까지 진출했기 때문에 몽골군은 살얼음을 밟는 느낌이었다. 쿠빌라이는 이번에는 양양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대원이라는 국호를 세운 지 2년 뒤인 지원 10년(1273) 정월, 원군은 마침내 번성(樊城)을 함락했다. 이로써 양양의 운명은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양양성은 고립되어 쉴새 없이 긴급사태을 알렸으나, 재상 가사도는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수장 여문환(呂文煥)은 성내를 돌 때마다 남쪽을 향해 통곡했다고 한다. 더는 손 쓸 방법이 없었다. 마침내 쿠빌라이의 항복 권고문이 도착했다. - P252
 
이후에는 몽골이 중원에서 실권적으로 우위에 서게 되었다. 고려는 이 때 몽골과의 외교적 변화를 꾀했다. 쿠빌라이 지원 원년(1264)에 아릭 부케 평정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는데, 고려의 원종은 권신 김준의 반대를 물리치고 직접 그 행사에 참가했다. 고려는 건국 이래 346년, 24대왕으로 이어지는 동안 외국의 책봉을 받은 일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왕이 직접 외국에 입조한 일은 없었다. 이때 원종의 입조가 처음이었다. 몽골 제국도 성격이 바뀌었지만 고려도 바뀌었다. 그때까지 고려의 국왕은 권신의 강한 반대를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원종은 김준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대도(大都, 북경)로 갔고, 그리고 무사히 돌아왔다. 몽골의 힘을 등에 업고 있으면 권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몽골의 힘에 의지하면서 고려의 속국화는 진행속도가 빨라졌다. - P300 원은 남송을 완전히 제압하고 싶어했다. 일본은 여전히 남송과 통상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나라에 괴씸죄가 부과된 것은 아닐까. 어쨌든 원은 일본에 원정을 감행한다. 고려는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한 상황에서도 의병, 삼별초 등의 항쟁이 이어지면서 원을 계속 괴롭혔다. 하지만 원은 삼별초 항쟁을 물리치고 고려에 전선 건조와 병사, 어부 등의 동원 명령을 내린다. 그럼에도 원은 일본 원정에 두 차례나 실패했는데 이는 일본의 운(?)도 있었겠지만 급박스런 선박 건조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란 해석이 많다. 두 번에 걸친 원정 실패에도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두 번 모두 전쟁에 진 것이 아니라 태풍으로 함대가 궤멸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전선을 건조하고 병대를 파견한 고려와 남송이 떠안았을 뿐 원나라는 그다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일본 원정으로 고려와 남송이 피폐해지는 것을 어쩌면 원나라는 바랐는지도 모른다. 피폐해질수록 반항할 기력도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안일한 생각이었다. 강남 지방에서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제2차 원정에 실패한 이듬해 쿠빌라이는 다시 고려에 전함 건조를 명령하고 일단 폐지한 정동행성을 부활했다. 충렬왕은 좌승상으로 임명되었다. 그러한 때에 강남에서 반란이 잇따라 일어나 일본 원정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쿠빌라이는 여러 번 일본 원정을 계획했으나, 그때마다 사고가 일어나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 P324
 
원나라는 북경을 국도로 삼았기 때문에 운하 외에 바닷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겨울철 결빙기를 제외하면, 천진의 백하(白河) 하구가 북경의 주요 항구가 되었다. 해상 수송의 이점은 운하 수송보다 큰 배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해안의 염전 단지에서는 편리하다는 이유로 해상 수송을 많이 이용했다. - P397 강남 땅을 손에 넣은 원 왕조의 사치는 심해졌고 이제는 강남이라는 곳이 원에 없어서는 안될 정도가 되어 버린다. 해상 수송을 이용하게 되면서 해적이 출몰하게 되는데 해적 소탕을 명했음에도 별 효과는 없었던 모양이다. 이런 배경에서 방국진의 난을 시작으로 온갖 군벌들이 등장하였다. 장사성도, 주원장도 이런 세력들 중 하나였다. 장사성이 고우에서 남하한 것은 기아(餓) 지대에서 탈출하기 위해서지 특별히 장래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에 비해 주원장의 남하는 이선장의 의견에 따른 것으로, 이것은 확실히 장래를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더구나 이 남하군은 매우 숙연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 주민을 학대하지 말라는 명령은 말단까지 철저했다. 이것은 홍건군의 전통이기도 했지만 이선장의 헌책이기도 했다. - P464
여러 가지로 명나라의 주원장은 한나라의 유방과 비슷해서인지 비교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공격하면서도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하는 등의 태도와 유방 곁에 장량이라는 참모가 있었듯 주원장 곁에는 이선장이 있었던 것이다. 여러 군벌들 중 최종 승자는 주원장이었고 명나라는 이렇게 건국되었다.
 
책임자가 되면 주변에 있는 것을 모두 쳐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홍무제는 여러 번의 옥사를 일으키며 주변 세력을 남김 없이 섬멸한다. 호유용과 남옥의 옥(獄)에 관해서는 다음에 인용하는 조익의 의견이 정확할 것이다.
명조(明祖, 홍무제)에 이르러 옥사를 일으킨 것이 빨랐다 해도 천하가 평정되었을 때는 그의 나이 이미 60세였다. 의문태자(懿文太子, 주표)는 온화하고 인자했다. 의문이 죽고 손자는 더욱 나약했다. 마침내 앞날을 염려치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또다시 대옥을 일으켜 일망타진했다. 이것으로 그의 심사를 추측할 수 있다. 호유용이 죽은 것은 홍무 13년으로, 함께 주살된 자는 진녕, 도절 등 몇 명에 지나지않는다. 호당(胡黨)의 옥에 이른 것은 23년의 일이다. 호유용의 죽음에서 10여 년이 지났는데, 어찌 죽은 역적의 공모자라 하여 10여 년이지난 지금 새삼스레 문죄할 수 있으랴. 이는 호유용을 빙자하여 죄목을 만들어 여러 사람을 견제하고 이들을 올가미에 얽으려는 계책일뿐이다. 호당을 이미 주살하고도 여전히 미진하여 26년에 다시 남당의 옥을 일으켰다. 이로써 모든 공신과 숙장이 사라졌다. - P523

'리뷰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민족의 장군 홍범도  (0) 2023.09.07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8  (0) 2023.08.31
[책] 기호의 제국  (1) 2023.08.21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0) 2023.08.21
[책] 젠더와 역사의 정치  (0) 2023.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