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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토지 20

category 리뷰/책 2023. 8. 1. 15:10
토지 1권부터 20권까지 근 1년여 기간 동안의 독서 대장정을 끝마쳤다. 뒤로 갈수록 대강 훑어 읽은 느낌이 들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뭉클함이 있었던 것을 보면 작가의 필력과 내공은 역시 대단했다 싶다.
 
20부는 무엇보다 조선인이면서 앞장서서 조선인들을 징용으로 끌고 가게 만든 장본인이 심판을 받아서 후련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뒷맛이 개운하지 않은 것은 어쩔 수가 없지만. 그 한 사람의 무게가 징용 인원 몇 십명 또는 몇 백명의 무게와 어찌 견줄 수 있겠는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미래이지만 사람은 당장 내 앞가림을 위해서 누구보다 잘 살고 싶어서 내 동포를 팔아넘기는 유혹에 굴복하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유혹을 이기고 올바른 판단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기 어렵다는 것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인류는 여전히 나, 개인, 그리고 자국의 이익에 우선하여 돌아가는 모습만 보아도 이것은 역사를 넘어선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강두매와 홍이는 만주에 온 영광과 한 자리에서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이상현 씨 말이야. 인생이 시궁창인 걸 모르겠어?
하는 일 없이 땀 흘려 만들어낸 곡식이나 축내고."
"나도 이선생을 곱게 보는 사람은 아니다. 자네 말대로 나 역시 프롤레타리아니까. 하지만 인간성을 철저히 부정하는 그것에는 동조 못 해! 인민은 일하고 밥 먹는 기계 아니야!"
"기계가 되어야만 미래가 열린다. 그때까지 고생을 해야 해."
"인간은 기계 부속품같이 그렇게 해체되는 게 아니야. 이 만주 벌판 눈구덕 속에서 수많은 우리 조선인들이 죽어갔지만 그들은 심정적으로 죽어갔어. 고귀한 마음으로 죽어갔단 말이야!"
강두매와 홍이는 한 바탕 설전을 벌인다. 송영광은 진심으로 싸우는 줄 알고 놀랐고 홍이는 별 일 아니라 했지만 왠지 슬퍼보였다.
"서로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적어도 강두매는 깨끗하다. 깨끗한 정열이지. 사심이 없다. 그런 면에서 친구지만 나는 그를 존경한다. 하지만 심정적으로 거부감이 있어. 획일적인 그것이 맘에 안 들어. 주의와 주장이 어떻게 다르다고 하더라도 결국 정치나 조직은 다수를 통제하는 것, 보다 이상적으로는 전부를 통제하는 것 아니겠어? 나는 정치나 조직 같은 게 생리적으로 싫어. 당장 시급한 것은 내 터는 찾아야 하고 억압하는 왜적은 물리쳐야 하고, 싫고 좋고 가릴 처지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저는 뭡니까? 돼지군요."
영광의 '돼지' 타령은 이상현과 이어진다. 머리도 몸도 굴리지 않고 그저 한탄하며 사는 삶, 본인을 비하하는 동시에 나아가 이상현도 그런 사람의 일종이라는(강두메의 주장처럼)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 시대 룸펜들을 비하하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영광은 뒤에 정석과 이상현을 만난다. 송관수의 아들인 송영광을 보면서 이상현은 그가 자신과 비슷한 동족임을 느꼈는지 동질적인 감정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송영광도 전쟁이 끝나더라도 조선으로 돌아갈 지 어떨지 결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서 이상현과 같은 방향일지 모른다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사람도 그 감정도 정리하지 않은 채 도망치듯 떠밀려 만주로 온 송영광, 그리고 몇 십년째 만주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상현, 둘은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는 것만큼은 공통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조병수가 지리산 절로 아들인 남현과 함께 발걸음을 했다. 길상이 그린 관음탱화를 볼 겸 스님이 된 소지감도 만날 겸 해서다. 둘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스스로의 삶을 돌아본다.
 
"불구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나비같이 살았을 것입니다. 화려한 날개를 뽐내고 꿀의 단맛에 취했을 것이며 세속적인 거짓과 허무를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내 이 불구의 몸은 나를 겸손하게 했고 겉보다 속을 그리워하게 했지요. 모든 것과 더불어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물과 더불어 살게 되었고 그리움 슬픔 기쁨까지 그 나뭇결에 위탁한 셈이지요. 그러고 보면 내 시간이 그리 허술했다 할 수 없고..." - P96
 
아비인 조준구가 없었다면, 불구의 몸이 되지 않았다면 병수는 더 행복했을까. 병수의 말을 들으며 나는 그가 비록 신체적으로는 자유롭지 못했지만 정신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존재임을 느낄 수 있었다. 자유로운 신체를 가졌어도 그 아비는 남을 해치고 욕을 먹는 비루한 삶을 살았다면 그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 그런 망나니 같은 아비를 탓하지 않았으며 아비가 돌아갔을 때도 진심으로 울던 이가 그였다. 누구나 조병수처럼만 산다면 이 세상은 희망적일텐데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홍이는 한복이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홍석기라는 청년을 만난다. 그는 낯선 이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징용 갔다가 어느 할머니의 도움으로 무사히 도망할 수 있었다고 자신의 처지를 술술 내뱉는다.
 
"할머니가 따라왔기 때문에 별 탈이 없었지요. 부처님한테 너가 무사하기만을 빌겠다, 지금도 생각이 나는데 그 할머니 얼굴이 바로 부처님 같았십니다."
"세상에 일본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다 있나? 하 참."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동쪽을 보고 절을 합니다. 할머니한테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지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장가든 지 한 달도 못 되어 잡혀간 홍석기. 징용에서 도망나온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일 것이겠지만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감행했을지, 그리고 끝내 징용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다치거나 죽어서 돌아온 이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생각하면 뼈아프고 숨이 가쁘다. 그런 그의 사연을 듣고 홍이는 도와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홍이는 그 때문에 곤욕을 겪는다. 조그마한 일로도 정치, 사상범으로 몰아 잡아 가두던 시절이었으니 오죽했을까.
 
김두수는 만주를 떠나 서울로 아예 들어온다. 이제 나이도 들었고 더 이상 만주에서 자신이 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대받으며 살아온 것이 어디 나라 탓이오? 아버지 죄업 탓이지."
"반가에 태어나서 시정잡배만큼의 대접도 못 받고 능멸과 하시 속에서 살았다. 왜 그랬지? 어떤 놈은 만석 살림으로 떵떵 거릴 적에, 나라도 살인했겠다! 하고말고, 아버지 잘못인가? 이놈의 땅, 세상 때문이지."
"딱하요. 세상에 그런 억지가 어디 있소?"
 
김두수는 애초부터 사람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라곤 한복이 밖에 없었다. 결국 김두수는 한복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같은 부모를 두었지만 김두수(김거복)와 김한복의 삶은 어쩌면 이리도 다른지. 한 사람은 세상 탓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러지 않고 주어진 운명을 감내하고 욕 안 먹으며 살아왔다. 한복이는 형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끼는데 이 감정은 독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명희가 마음을 먹고 내 놓은 거금을 둘러싸고 운동 세력 간에 충돌과 갈등이 발생한다. 충돌의 중심에는 이범준과 몽치다. 이범준은 극렬한 사회주의자인 반면 몽치는 그런 이념과는 거리를 두었고 어찌 보면 신분제에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도 있음에도 그 세계에 부합하며 사는 측면이 있다. 이 무렵 지리산에는 이범준을 받들며 모여든 많은 청년들이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모두 동학의 교도라 할 수는 없지만 계급 타파에 대해서는 이론보다 심장으로 받아들이고 있어. 이 땅 식으로, 말하자면 토종, 순종이라 할 수 있는데 자네는 그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결국은 민족주의 얘기로군요. 그것은 반통합적이며 세계혁명으로 가는 길에는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를 혼돈하지 말게."
"이 말 저 말 할 것 없고, 지금이야말로 적기입니다. 무너져 가고 있는 일본, 느슨해진 후방, 이때야말로 우리가 나설 때 아닐까요? 후방을 교란하는 유격대를 조직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해외파들에게 국내에서도 체면이 서는 일이며 민심에도 크게 고무될 것입니다. 앉은뱅이 늙은이도 아니겠고 암죽 받아먹는 갓난아기도 아니겠고 이 산에 있는 사람들은 피 끓는 청년들입니다. 넘쳐나는 힘, 열정에 불타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 생광스러운 힘을 산속에 사장하려는지 도무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전력들이 범상하지 않은 여러분께서 이렇게 무기력해도 되는 겁니까? 저는 여러 번 실망했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지금 살아 있습니까? 죽어 있는 것입니까? 왜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까?" - P384~386
 
이범준의 말은 과격하지만 분명 이해되는 측면이 있었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방향이 다른 것일 뿐인데 이러한 갈등과 충돌을 보면서 해방 후 극렬한 좌우대립의 미래가 그려지는 건 비단 나뿐이 아닐 것 같다. 물론 당시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독립이 되면 우리 나라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미래상을 떠올려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테지. 눈을 뜬 몇몇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들이 많았고 사회주의 안에서도 분파들이 많았다. 나는 이런 잠재적인 불안 요소를 작가님께서 미리 배치해두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끝은 났지만 뒤의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들이 많다. 주갑이 아저씨는 살아 계시는건지, 인실이는 어떻게 되었으며 오가타와 쇼지와는 만났는지, 윤국이와 성환이는 살아 돌아오는건지 등등... 그러나 그 많은 인물들의 소식을 다 담기란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설은 상상하는 묘미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독자의 기호에 맞게 그들의 미래가 어떠했을지 떠올려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