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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해방 일기 1

category 리뷰/책 2013. 9. 21. 14:22




해방일기. 1: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저자
김기협 지음
출판사
너머북스 | 2011-05-02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역사학자 김기협, 65년전의 ‘오늘’에서 민족의 미래를 찾는다!...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1945년 8월 일제의 억압과 굴레를 벗어나 마침내 조선은 36년만에 일제로부터 자유를 찾았다.

 

그러나 이것이 해방인가 광복인가 논란은 여전히 많다.

분명 우리는 많은 저항을 했고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정적인 한 방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해방이란 단어가 적절하다는라는 입장과 우리가 한 저항과 노력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면에서 광복이란 단어가 적절하다 말하는 입장 말이다.

어쨌든 임시정부가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일제의 항복으로 인해 이를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니 우리로서는 안타까운 일이다.

 

<해방일기>는 역사학자 김기협이 1945년 해방한 날로부터의 기록을 일기 형식으로 쓴 책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일기라는 특성상 장단점이 있다.

주관성을 잃는다는 단점이 있지만 한 날의 기록을 세세하게 들여다봄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고 일반적인 기록과는 다른 내용으로 조금 더 흥미를 자아내는 면이 많다.

일기는 자료를 참고하지 않고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에 소설처럼 그 부분에서는 얼마든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는 독자로서도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일기형식이라고 해도 작가의 많은 노력이 엿보였다. 자료를 찾기 어려운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당부분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대기 위해 책, 논문, 백과사전 등 참고자료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1권(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은 1945년 8월 1일부터 10월 29일까지의 기록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이기도 했는데 책의 부제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해방 이전에 해방을 어떤 식으로든 예견했다는 사실이다."

예전에 학교에서 배우기로는 물론 일제가 패망의 기운이 있기는 했지만 미국이 일본에 폭탄을 투하했고 그러는 바람에 일제가 갑작스레 항복을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책의 내용대로라면 대부분의 조선인은 물론이고 일본인들도 패전을 알고 있었고 이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5월 독일이 이미 항복을 선언하고 나서 전쟁의 책임을 지고 나온 마당에 마지막 남은 일본이 발악한다고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항복을 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가장 안전하게 이득을 취하며 항복을 할 수 있는지 생각했을 것이다.

 

일본에게는 두 가지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첫째는 당연히 최대한 너그러운 조건을 확보하는 것. 둘째는 소련보다 미국에게 운명을 맡길 것. 패전 독일은 국체를 지키지 못했다. 일본 지도자들은 일본이 그보다 나은 대접을 받기를 바랐다.

(66p)

 

어쨌든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은 모든 조선인들에게 기쁨이었기도 했지만 당황스러움이기도 했던 것 같다.

건준을 이끌고 있었던 여운형이나 임정을 이끌고 있었던 김구 같은 인물은 더더군다나 그랬을 것이다.

비밀리에 엔도 총감이 중도좌파였던 여운형에게 조선의 치안과 유지를 요청했던 것을 보면 일본도 어지간히 급했던 것 같다. 총독부를 존중해줄 수 있으면서도 친일파로 몰리지 않을 인물은 그가 최적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총독부와 접촉하던 송진우도 있기는 했지만 그는 조선의 치안을 맡기에는 부족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호방한 성품의 소유자인 여운형은 식민지배를 비판하면서도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감정적 비판보다 가해자의 문제점을 함께 걱정해 주는 대범함으로 식민지배자들의 존중도 받으면서 더불어 포섭 내지 협력의 희망을 버리기 힘들게 만든 것 같다.

(62p)

 

38선이 그어지고 미소군의 점령이 시작되었다.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북한에 주둔했던 소련군이 한 것과 남한에 주둔한 미군의 서로 다른 방침과 행동들이었다.

 

본인의 지휘하에 있는 제군은 연합국군 총사령관의 명령에 의하여 장차 발할 본인의 각종 명령을 엄숙히 지켜라. 제군은 평화를 유지하며 정직한 행동을 하여라. 만약 명령을 아니 지킨다든지 또는 혼란상태를 일으킨다면 본인은 즉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수단을 취하겠노라.

이미 확정된 항복조건을 이행함에는 본인은 시초에 있어서는 현 행정기구를 사용할 필요가 있노라. 동시에 본인은 장차 나의 지휘하에 있을 관리의 명령에 복종하기 바란다.

1945년 9월 9일 (by 미국 24군단장 하지 중장)

(191p)

 

붉은 군대는 조선인민들이 자유롭게 창작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주었다. 조선인민 자체가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하는 자로 되어야 할 것이다.

붉은 군대 사령부는 모든 조선 기업소들의 재산보호를 담보하며 그 기업소들의 정상적 작업을 보장함에 백방으로 원조할 것이다.

붉은 군대 사령부(by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

(192p)

 

치스차코프의 포고문이 당시의 한국인이 할 일에 대해 한국인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담은 것이라면, 하지의 성명서는 한국인이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 미국인이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담은 것인데 차이가 있다.

(193p)

 

소련군은 인민위원회에 권한과 책임을 넘겨줌으로써 자치를 허용해주었고 결과적으로 이것이 미래를 건설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미군은 왜 이렇게 하지 못했던 것인가?

 

그리고 미군은 조선 정부의 구성원들을 그대로 유지시키면서 일본을 위해 충성하던 친일파를 그대로 끌어안고 갔다. 기존 체제를 잘 알고 있었고 일본에 충성하던 그들이 자신들에게도 충성하리라는 믿음 하에 구성원들의 변화를 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여전히 친일파는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게 된 것이 아닐까.

 

한국인 고문단 임영에는 한국인의 참여를 과시하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북한에서 보여준 소련군의 조치와 비교하면 여러모로 빈약한 조치였다.

주체적 역할이 없는 자문직에 불과했고, 그 구성도 구색을 맞추기 위해 끼워넣은 여운형과 조만식을 제외하면 모두 미군정에 순종적인 한민당 사람들이었다.

(303p)

 

미군이 들어오면서 통역 또한 한민당 세력의 사람들이 된 것은 당연했다. Yes가 No가 되고 근거없는 주장을 펴는 등 엉터리 통역이 많았을거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이런 면에서 하지와 아놀드는 조선에 대한 아무런 책임 의식이 없이 조선에 들어왔다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군정에서 부유층을 우대하고 대중의 지지를 받는 좌파를 제외시킴으로써 우리는 애초 균형을 벗어나 부유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을 너무 많이 뽑았던 것 같다. 실용적인 목적 때문에 우리는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을 채용해야 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과 그 친구들은 주로 돈 있는 계급 출신이었다.

(1945년 11월 26일 국무성에 보낸 서신)

 

무엇보다 미군은 미군정 이외에 다른 정치 세력들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결과적으로 조선 정국을 혼란하게 만든 책임이 크다 하겠다.

 

군정청이라는 것은 일본의 통치로부터 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민주주의 정부를 건설하기까지의 과도기간에 38도 이남의 조선 지역을 통치, 지도, 지배하는 연합군 최고사령관 지도하에 미국군으로서 설립된 임시정부이다. 군정부는 남부 조선에서 유일한 정부이다.

(37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