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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서] 사랑의 기술

category 리뷰/책 2013. 2. 7. 10:10

1장 사랑은 기술인가


[13] 현대인들은 사랑을 갈망하고, 행복한 사랑의 이야기,

불행한 사랑의 이야기를 펼쳐놓는 무수한 영화를 보며, 사랑을 노래한 시시한 수백 가지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사랑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14] 사랑에 대해서 배울 필요가 없다는 태도의 배경이 되는 두 번째 전제는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정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사랑할 또는 사랑받을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16] 사랑에 대해서는 배울 필요가 없다는 가정에 이르게 하는 세 번째 오류는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 혹은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혼동하는 것이다.


[17]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적절한 방법은 오직 하나뿐인 것 같다.

곧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고 사랑의 으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최초의 조치는 삶이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배우고 싶다면 우리는 다른 기술,

예컨대 음악이나 그림이나 건축, 또는 의학이나 공학 기술을 배우려고 할 때 거치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기술을 배울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는 무엇인가?


[18] 편의상 기술 습득 과정을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이론의 습득, 둘째는 실천의 습득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천의 습득 외에도 어떤 기술ㄷ을 숙달하는 데 필수인 세 번째 요인이 있다.

곧 기술 숙달이 궁극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장 사랑의 이론


[23] 사랑에 대한 어떠한 이론이든 인간론으로부터, 곧 인간 실존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인간의 실존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인간이 동물계로부터, 곧 본능적 적응의 세계로부터 벗어났고 자연을 초월해 있다는 사실이다.


[24] 분리 경험은 불안을 일으킨다. 분리는 정녕 모든 불안의 원천이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인간적 힘을 사용할 능력을 상실한 채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무력하다는 것, 세계를 적극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나의 반응 능력 이상으로 세계가 나를 침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5] 게다가 분리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일으킨다.
남자와 여자가 자기 자신과 서로를 알게 된 다음, 그들은 분리되어 있고, 그들이 서로 다른 성에 속하는 것처럼 서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아직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남남으로 남아 있다.
인간이 분리된 채 사랑에 의해 다시 결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 이것이 수치심의 원천이다.
동시에 이것은 죄책감과 불안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이다.
이 목적의 실현에 '절대적으로' 실패할 때 광기가 생긴다.
우리는 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물러남으로써 분리감이 사라질 때에 완전한 고립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인간이 분리되어 있던 외부 세계도 사라져버린다.


[29] 도취적 합일의 모든 형태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강렬하고 심지어 난폭하다는 것, 둘째는 퍼스낼리티 전체에, 몸과 마음에 일어난다는 것,
셋째는 일시적이고 주기적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되는 것이 과거와 현재에 있어서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해결책으로 채택하고 있는 합일의 형태, 곧 집단과의 일치에 바탕을 둔 합일이다.
이것은 개인의 자아 대부분이 사라지고 그 목적이 군중에 소속되어 있는 합일이다.


[30] 대부분의 사람은 일치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욕구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기호에 따르고 있으며,
자신은 개인주의자이고 스스로의 사고의 결과로 현재의 견해에 도달했으며, 자신의 의견이 사람들 대부분의 의견과 같은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31] 만인과의 의견 일치는 '자신의' 견해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아직은 어느 정도 개성을 느끼고 싶다는 욕구가 남아 있어서 이러한 욕구는 사소한 차이에 의해 만족된다.
차이를 제거하려는 경향이 이와 같이 강화되는 것은 가장 발달한 산업 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평등의 개념 및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33] 현대의 대량 생산이 상품의 규격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사회적 과정은 인간의 표준화를 요구하고 이러한 표준화를 '평등'이라고 한다.  

일치에 의한 합일은 냉정하고 관례에 따라 지시되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때로는 분리 상태에서 생기는 불안을 진정시키기에 불충분하다.
게다가 주로 정신에만 관계되고 육체에는 관계되지 않으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도취적 해결책과 비교하면 결함이 있다.
군중과의 일치에는 단 한 가지 이점이 있을 뿐이다. 곧 이것은 발작적이지 않고 지속적이다.


[34] 합일을 이루는 세 번째 방법은 '창조적 활동'이다.
어떤 종류의 창조적 작업이든 창조하는 자는 외부 세계를 나타내는 자료와 결합한다.


[35] 생산적 작업에서 이루어지는 합일은 대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도취적 융합에서 이루어지는 합일은 일시적이다.
일치에 의해 달성된 합일은 사이비 합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합일은 실존의 문제에 대한 부분적 해답에 지나지 않는다.
완전한 해답은 대인간적 결합, 다른 사람과의 융합의 달성, 곧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36] '공서적 합일'은 임신한 어머니와 태아의 관계에서 그 생물학적 유형을 볼 수 있다.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는 복종, 또는 피학대 음란증(마조히즘)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자신을 지휘하고 인도하고 보호하는 사람, 말하자면 자신의 생명이고 산소인 다른 사람의 일부가 됨으로써
견디기 어려운 고립감과 분리감에서 도피한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독립하지 못한다. 그는 통합성을 갖지 못한다.
그는 아직도 완전히 탄생하지 못한 자다.


[37] 피학대 음란증적 사랑의 관계라는 세속적 맥락에서도 본질적 메커니즘, 곧 우상 숭배의 매커니즘은 동일하다.
피학대 음란증적 관계에는 신체적 성적 욕망이 혼합될 수도 있다.
피학대 음란증적 복종에는 운명에 대한, 병에 대한, 율동적 음악에 대한, 마약 또는 최면적 황홀경에 의해 발생한 도취적 상태에 대한 복종이 있다.
이러한 모든 경우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자신의 통합성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 또는 자신의 밖에 있는 어떤 것의 도구로 만든다.

공서저 융합의 '능동적' 형태는 지배, 혹은 피학대 음란증에 대응되는 심리학적 용어를 사용하면, 가학성 음란증(사디즘)이다.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서 고독과 갇혀 있다는 감정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을 숭배하는 다른 사람을 흡수함으로써 자신을 팽창시키고 강화한다.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도 복종하는 자에게 의존한다.


[38] 공서적 합일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40]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44] 사랑의 능동적 성격은, 준다고 하는 요소 외에도, 언제나 모든 사랑의 형태에 공통된 어떤 기본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해진다.
이러한 요소들은 보호, 책임, 존경, 지식 등이다.

사랑에 보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자식에 대한 모성애에서 가장 명백히 나타난다.


[46] 보호와 관심에는 사랑의 또 하나의 측면, 곧 '책임'이라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은 책임이 흔히 의무, 곧 외부로부터 부과된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책임은, 그 참된 의미에서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행동이다.
책임은 다른 인간 존재의 요구에 대한 나의 반응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할' 수 있고, '응답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47] 만일 사랑의 세 번째 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할 것이다.
존경은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이와 같이 존경은 착취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내'가 독립을 성취할 때에만, 곧 남을 지배하거나 착취하지 않아도 서서 걸을 수 있을 때에만 존경이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존경은 오직 자유를 바탕으로 해서 성립될 수 있다.

보호와 책임은 지식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다면 맹목일 것이다.
지식은 관심에 의해 동기가 주어지지 않으면 공허할 것이다.


[48] 사랑의 한 측면인 지식은 주변에 머물지 않고 핵심으로 파고드는 지식이다.


[51]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의 '행위'에 있다.
이 행위는 사상을 초월하고 언어를 초월한다.
인간을 객관적으로 알게 될 때에만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인간의 궁극적 본질을 알 수 있다.


[60]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현재의 상태', 곧 어머니의 자식으로 존재하는 것뿐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지복이고 평화이며, 획득할 필요도, 보상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 사랑의 무조건적 성질에도 역시 부정적 측면이 있다.
어머니의 사랑은 보답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획득될 수도, 만들어낼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
어머니의 사랑이 여기에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어머니의 사랑이 여기에 없다면 그것은 마치 인생의 모든 아름다움이 사라져버린 것과 같다.
어머니의 사랑을 만들어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65]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이 있는 사랑이다.
아버지의 사랑의 원칙은 '너는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에, 너는 네 의무를 다하고 있기 때문에,
너는 나를 닮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조건부 사랑에서도 우리는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에서와 마찬가지로 소극적 측면과 적극적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보답을 바라기 때문에 기대하는 바를 달성하지 못하면
사랑을 잃게 된다는 사실은 아버지의 사랑의 소극적 측면이다.
적극적 측면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부이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얻으려고 무슨 일인가를 할 수 있고 노력할 수도 있다.
아버지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처럼 나의 통제를 벗어나 있지는 않다.


[69]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70] 사랑의 모든 형태의 바탕에 놓여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사랑은 '형제애'이다.
나는 형제애라는 말로 책임, 보호, 존경, 다른 사람에 대한 지식, 다른 사람의 생명을 촉진하려는 소망 등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성서에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사랑이다.
형제애는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의 특색은 배타성이 없다는 것이다.
형제애를 통해 사람들과의 결합과 인간적 일치를 경험한다.


[74] 어머니와 어린아이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관계이며
이 관계에서 한쪽은 전적으로 도움을 구하고다른 한쪽은 도움을 준다.


[84] 다른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우리의 감정과 태도의 '대상'이며,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에 대한 태도는 모순되기는 커녕, 기본적으로 '결합적'인 것이다.


[87] '비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 뿐이고'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자랑한다.
그는 자신의 비이기주의에도 불구하고 불행하며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조차도 원활하지 못한 데 대해 당황스러워한다.


[89] 신에 대한 사랑은 분리 상태를 극복하고 합일을 이룩하려는 욕구에서 생긴다.
사실상 신에 대한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다른 성질과 측면을 갖고 있다.
모든 유신론적 종교에서는, 그것이 다신론이든 일신론이든, 신은 최고의 가치, 가장 바람직한 선이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특별한 의미는 한 사람에게 가장 바람직한 선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신의 개념에 대한 이해는 신을 숭배하는 사람의 성격 구조를 분석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3장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


[119] 근대 자본주의는 원활하게 집단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

더욱 많이 소비하는 사람들, 그 취미가 표준화되고 쉽게 영향받고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근대 자본주의는 권위나 원리, 또는 양심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고 독립되어있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즐거이 명령에 따르고 그들에게 기대되는 일을 하고 마찰없이 사회기구에 순응하는 사람들,

폭력없이 관리되고 지도자 없이 인도되고 목적없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120] 그 결과는 어떠한가?
현대인은 자기 자신, 동료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는 상품으로 변하고, 현재의 시장 조건 아래서 최대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투자로써 자신의 생명력을 경험한다.
인간 관계는 근본적으로 소외된 자동 기계같은 관계가 되고,

각자는 군중과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따라서 사상이나 감동이나 행동에서 각자의 차이가 없다.

[128] 상호 성적 만족으로서의 사랑과, 팀워크로서 고독으로부터 피난처로서의 사랑은

현대 서양 사회에서의 사랑의 붕괴, 사회적으로 유형화된 사랑의 병리학의 두 가지 표준적 형태다.

신경증적 사랑의 기본적 조건은 애인 가운데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이 모두 어버이 상에 애착을 느끼고 있고,

어른이면서도 일찍이 아버지 또는 어머니에 대해 품고 있던 감정, 기대, 공포를 애인에데 전이한다는 사실에 있다.


[129] 오늘날 자주 볼 수 있는 이러한 신경증적 애정관계에 대한 다음 예는

정서적 발달 단계가 어머니에 대한 유아적 애착을 벗어나지 못한 남자들을 다루고 있다.

어머니의 무조건적 사랑, 곧 그들이 필요로 하고,

그들이 그녀의 자식이고 그들이 무력하다는 것 이외의 다른 이유 없이 베풀어지는 사랑을 바라고 있다.

이러한 남자들은 그들을 사랑하도록 여자를 유인하려고 할 때, 그리고 이에 성공한 다음에도 매우 정답고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여자에 대한 관계는 표면적이고 무책임하다.

그들의 목적은 사랑받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132] 신경증적 증상의 다른 형태는 주로 아버지에게 애착을 느끼는 경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아들의 행동에 만족할 때에는 언제나 아들을 칭찬하고 선물을 주고 정답다.

그러나 아들에게 불만을 느낄 때에는 언제나 뒤로 물러서거나 꾸짖는다.

아들은 아버지의 애정이 유일한 애정이므로, 노예적인 방식으로 아버지에게 집착한다.

아들은 생활의 주요 목표가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흔히 사회적 경력에서는 매우 성공적이다. 그들은 양심적이고 믿을 만하고 성실하다.

그러나 그들은 여자 관계에서는 초연하고 멀리 떨어져 있다.


[134] 흔하지는 않으나 가끔 '위대한 사랑'으로서 경험되는 사이비 사랑의 형태는 '우상 숭배적 사랑'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힘의 생산적 전개에 바탕을 둔 동일성, 곧 자아를 인식하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우상화'하기 쉽다.

그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부터 소외되고 이 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투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최고 선, 곧 온갖 사랑, 온갖 빛, 온갖 지복을 간직하고 있는 자로서 숭배한다.


[135] 우상 숭배적 사랑의 특징은 첫째로 강렬하고 갑작스러운 사랑의 경험이라는 점이다.

사이비 사랑의 다른 형태는 '감상적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사랑은 환상 속에서만 경험될 뿐,

실재하는 다른 사람과 여기서 지금 맺고 있는 관계에서는 경험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러한 사랑의 본질이 있다.


[136] 신경증적 사랑의 또 하나의 형태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고

그 대신에 '사랑하는' 사람의 결함이나 결점에 관여하려고 '투사적 메커니즘'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개인은 집단, 민족 또는 종교와 매우 흡사한 행동을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사소한 결점까지도 낱낱이 비판하고 자기 자신의 결점을 천연덕스럽게 무시해버린다.

항상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개조하기에 바쁜 것이다.

두 사람이 모두 이와 같이 하면 사랑의 관계는 상호 투사의 관계로 변한다.


[137] 투사의 또 다른 형태는 자기 자신의 문제는 어린아이들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자식들에 대한 소망은 일차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실존의 문제를 자식의 문제에 투사함으로써 결정된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어서나 자식들에 대해서나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다.



4 사랑의 실천


[148] 우선 기술의 실용에는 '훈련'이 요구된다.

훈련된 방식으로 이 기술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 기술에 숙달되지 못할 것이다.

현대인에게는 훈련보다 더 익히기 쉬운 것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현대인은 일을 떠나서는 자기훈련의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하고 있다.


[149] 현대인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목적을 위해,

자기 나름의 것이 아니라 일의 리듬에 의해 그에게 지시된 방식으로 어쩔 수 없이 하루에 여덟 시간씩 자기의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반항하며,

그의 반항은 유아적 자기방종의 형태를 취한다.

덧붙여서 권위주의에 맞서는 싸움에서 현대인은 모든 훈련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훈련이 없으면, 생활은 파괴되고 혼란을 일으키고 중심을 잃게 된다.

'정신 집중'이 어떤 기술을 습득하는 데 필수조건이라는 것은 거의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자기훈련 이상으로, 정신 집중도 우리 문화에는 드물다.

반대로 우리 문화는 어떤 나라의 문화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심이 없고 혼란한 생활 방식으로 이끌어지고 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데 열중하고 또 그럴 용의를 갖춘, 입을 크게 벌린 소비자이다.

이와 같이 정신을 집중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자기 홀로 있기 어렵다는 점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150] 세 번째 요소는 '인내'다.

빠른 결과만을 바란다면, 우리는 결코 기술을 배우지 못한다.

그럼에도 현대인에게 인내는 훈련이나 정신 집중과 마찬가지로 어렵다.

우리의 모든 산업 조직은 정반대의 것, 곧 신속성을 추구한다.

현대인은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지 못할 때에는 무엇인가를, 곧 시간을 잃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해서 얻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지 못한다.

시간을 허비하는 것 말고는.

끝으로 어떤 기술을 배우는 조건은 기술 습득에 대한 '최고의 관심'이다.


[151] 기술을 배우는 일반적 조건에 대해서 한 가지를 더 보충해야겠다.

우리는 말하자면 기술을 직접적으로 배우지 않고 간접접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기 전에 다른 많은 일들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어떤 기술에 숙달하려면 삶 전체를 이 기술에 바치거나 적어도 이 기술과 관련시켜야 한다.

자기 자신이 기술 훈련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사랑의 기술에 대해서 이 말은, 이 기술 분야에서 명장이 되려는 야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삶의 모든 국면을 통해 훈련, 정신 집중, 인내를 '실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160] 사랑의 본성에 따르면, 사랑을 성취하는 중요한 조건은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아도취적 방향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만을 현실로서 경험하는 방향이다.

반면 외부 세계의 현상은 그 자체로서는 현실성이 없고 오직 이러한 현상이 자아도취적 인간에게 유익한가 위험한가에 따라 경험된다.

자아도취의 반대 극은 객관성이다.

이것은 사람들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이고,

이러한 객관적 대상을 자신의 욕망과 공포에 의해 형성된 상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162]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이다.

이성의 배후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겸손한 태도이다.

객관적이라는 것, 곧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한 태도를 갖게 되었을 때,

어린아이로서 꿈꾸고 있던 전지전능의 꿈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사랑의 기술의 실용이라는 관점에서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곧 사랑은 자아도취의 상대적 결여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사랑은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에 전 생애를 바쳐야 한다.


[163] 사랑의 능력은 자아도취나 어머니나 가족에 대한 근친상간적 애착으로부터 벗어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사랑의 능력은 성장하는, 곧 세계와 자신에 대한 관계에서 생산적인 지향을 발달시킬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탈피, 탄생, 각성의 이러한 과정은 필수적 조건으로서 한 가지 성질, 곧 '신앙'을 요구한다.

사랑의 기술의 실용은 신앙의 실천을 요구한다.

신앙은 무엇인가?

신앙은 반드시 신에 대한 믿음이나 종교에 대한 믿음의 문제인가?

신앙은 반드시 이성 및 합리적 사고와 대립되거나 분리된 것인가?

신앙의 문제를 이해하게 되려면 우리는 '합리적 신앙'과 '비합리적 신앙'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비합리적 신앙이라는 말을 나는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복종을 바탕으로 하는 믿음이라고 이해한다.

반대로 합리적 신앙은 자기 자신의 사고나 감정상의 경험에 뿌리박고 있는 확신이다.

합리적 신앙은 근본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확신이 갖고 있는 확실성과 견고성이다.


[164] 신앙은 특별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퍼스낼리티 전체에 고루 퍼져 있는 성격상의 특징이다.


[169] 신앙을 가지려면, '용기', 곧 위험을 무릅쓰는 능력, 고통과 실망조차도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필요하다.

사랑받고 사랑하려면 용기, 곧 어떤 가치를 궁극적 관심으로 판단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신앙과 용기에 대해서 연습이 필요한가?

사실상 신앙은 모든 순간에 연습할 수 있다.


[170] 신앙과 용기의 훈련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된다.

첫 단계는 어디서 언제 신앙을 상실하는가에 주목하고, 신앙의 상실을 은폐하는 데 이용되는 합리화를 간파하고,

어디서 우리가 비겁한 태도로 행동하는가, 또한 어떻게 비겁한 행동을 합리화하는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 없이 자기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사랑이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을 뜻한다.

사랑은 신앙의 작용이며 따라서 신앙을 거의 갖지 못한 자는 거의 사랑하지 못한다.


[171] 사랑의 기술을 실천하는 데 불가결한 한 가지 태도, 곧 '활동'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활동은 사랑의 실천에 기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나는 활동이라는 말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활동, 곧 자신의 힘의 생산적 이용을 나타낸다고 말하였다.

사랑은 활동이다.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나는 그나 그녀만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적극적 관심을 갖는 상태에 놓여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놓여 있는 역설적 상태는 깨어 있는 때에도 반쯤 잠들어 있고,

잠잘 때에 또는 잠들고 싶어할 때에도 반쯤 깨어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깨어 있다는 것은 싫증을 느끼지 않기 위한, 또는 싫증내지 않기 위한 조건이다.

사실상 싫증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 싫증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생활의 주요 조건 중 하나이다.

내면적인 게으름을 피하기 위해 수용적, 축적적 형태로든,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는 상태로든,

하루 종일 자신의 눈과 귀로 느끼고 사고하고 있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데 불가결한 조건이다.


[173] 공정성의 윤리는 '중용'의 윤리와 혼동하기 쉽다.

"다른 사람들이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하라"는 격언은 '다른 사람과의 교환에서 '공정하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 격언은 본래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성경 구절의 좀 더 대중적인 표현이었다.

중용의 윤리는 이웃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이웃과 하나가 되라는 것이고, 반면 공정성의 윤리는 책임이나 일체감을 느끼지 말고 멀리 떨어져 있으라는 것이다.


[174] 사랑의 실천은 공정성과 사랑의 차이를 인식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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