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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버치문서와 해방정국

category 리뷰/책 2022. 1. 24. 11:37

 

버치문서와 해방정국
저자 : 박태균
출판 : 역사비평사
발매 : 2021년 10월

해방 후 5년의 역사를 보다 보면 뼈아픈 순간이 많다.
이 순간엔 왜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을까 
대체 왜 라는 꼬리표를 지우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증오와 환멸감을 느끼면서도 이 때를 공부해야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의 갈등의 씨앗과 단초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는 연구를 위해 미국에 갔다가 문서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문서를 발견하게 된다.
버치 문서다. 
문서의 발견이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문서의 주인공인 버치는 누구인가? 미군정기 하지 사령관에 의해 발탁되어 조선에 온 인물이다.
당시 버치가 오게 된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이 때 조선은 모스크바 3상 회의 이후 신탁통치 찬반 논란 때문에 정국이 어지러웠고 농촌은 쌀값 폭동으로 민심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는 버치가 좌우합작위원회를 만들도록 했고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정책 이전까지 좌우합작위원회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미군정과 미군정기에 대한 평가가 박해질 수 밖에 없는데 
하지, 맥아더 이외에 버치라는 인물을 살펴봄으로써 해방 정국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책의 구성을 살펴 보면 1번 챕터를 제외하고는 
버치가 조선에 들어오고 미국에 다시 돌아갈 때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물과 사건을 다룬다.
여운형, 김구, 이승만, 김규식, 장덕수, 김성수, 김두한 등 유명한 인물도 있지만
강용흘 같은 잘 알지는 못했던 인물에 대해서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버치 문서 상자에 담겨 있던 자료들을 부록에 실어두어 
관련한 자료를 언제든 찾아볼 수 있게 해준 점이 감사했다.


인상 깊었던 대목을 몇 개 뽑아본다.

첫 번째, 강용흘이다.
강용흘은 1898년 함경남도 함원에서 태어나서 3.1운동에 참가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작가 활동을 했다.
자신의 삶을 그린 『초당』이라는 수필을 써서 1933년 구겐하임상까지 받았다고 한다. 
1946년 미군정청 출판부장에 임명되었고 1947~48년에 주한미군 제24군단 정치 분석관 겸 자문관을 역임했다.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이 필요했던 미군정 입장에서 발탁된 것으로 보인다.
강용흘은 친일파들을 비판했고 한국 사회의 문제점으로 경찰을 꼽으면서
해방 정국의 여러 암살 사건에 경찰이 연루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이승만과 김구가 경찰의 비호를 받고 있으니 그들을 감옥에 넣어야 한다고까지 이야기했다.
지금의 한국사회에 친일파들의 뿌리가 정제계와 연결되어 있고
경찰들이 한국 현대사 초기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두 번째, 여운형과 김규식이다.
해방 정국 좌우의 극한 대립으로 치달을 때 두 중심이 있었다.
여운형은 총 3챕터에 걸쳐서 다루고 있어 김규식은 2챕터를 할애하고 있다.
두 사람은 약간은 노선이 달랐지만 좌우합작을 위해 끝까지 노력한 분들이다.
그들에 대한 일기와 행적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분들이 있어서 해방 정국의 역사가 숨통이 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코 잊지 않아야 할 분들이다.

세 번째, 1946년 대구 추수봉기가 낳은 파장
1946년 대구에서 미군정 쌀 수집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집단 행동이 있었다.
미군정이 쌀 공급 통제를 위해 경찰들이 폭력을 자행하며  쌀 수집을 했던 것에 대한 분개였다.
헌데 이 사건은 좌우익 사이의 세력 관계를 역전시키고 만다.
각 지역의 좌파 조직이 노출되면서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되고 우익 세력이 지방을 장악해버린 것이다.
박헌영을 포함해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이북으로 도피했다.
서울에서는 이미 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으로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수배되고 좌파 신문들은 발간이 금지된 상태였다.
이로써 전국에 좌파가 들어설 입지가 줄어들면서 이승만과 우익 세력에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었다.

네 번째, 미군정의 오판. 한국 정치의 기원
미군정은 한국민주당과 한국독립당 사이를 떨어뜨리면서 좌우합작위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을 정부 수반으로 내세우고 의원내각제 하에서
한국민주당을 국회 다수당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어째서인가? 
미군정과 한민당 사이에 이미 갈등이 있었다. 
1946년 말 미군정법령 118호(과도입법의원:입법기관 설치를 위한 법령)에 과도입법의원에 일제에 협력한 사람을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추진되었으나 한민당이 강하게 반발하면서(친일파 대거 포함) 무산되었다. 
그리고 1947년 1월 17일 김성수는 하지에게 편지를 보낸다.
김성수는 버치가 한민당을 신뢰하지 않고 한국독립당과의 연합을 위한 노력을 방해하려 하고 있다 주장한다.
버치가 1946년 한국독립당의 조완구를 만난 자리에서 한민당이 모리배, 매국노, 친일파들의 모임이라 비난하며 한국독립당은 연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 한민당은 미군정의 여당으로 미소공동위원회 참여가 필수적이었음에도 반탁운동에 참여하면서 미소공위 참여를 거부했다. 
또한 한민당의 김성수는 실질적 맹주였기 때문에 버치와 김성수 사이에 갈등이 있으면 곤란했다.
이 때 미군정의 생각대로 좌우합작 지도자를 세우고 의원내각제를 만들 수 있다면 어땠을까.


버치 중위를 통해 해방정국의 역사의 
한 조각을 꿰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사 책을 오랫만에 읽었는데 '재밌으면 안되는데'  하며 읽었다.
지금의 한국의 모습이 투영되어 읽는 내내 씁쓸하고 그러면서도 재밌고 참 복합적인 기분이었다.

얼마 후면 대선이 있다.
한국의 5년 정치를 담보할 큰 일이다.
이 책을 통해서 한 순간의 판단이 자칫 큰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느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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